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단 편집) === 통합조직의 부재 === 하지만 각 군이 아무리 심각하게 반목할지라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통합 지휘기구가 있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미국]], [[영국]] 등은 [[대통령]]이나 [[수상]], [[의회]] 등에서 적절하게 조율이 가능했고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말을 무조건 따라야 했으니]] 그가 건재한 이상 딴 생각을 품는 건 불가능했다. 육군, 해군, 공군, 무장친위대가 한정된 인력, 자원을 두고 서로 으르렁대던 [[나치 독일]]조차도 실제 전장에서는 최고사령부의 목표대로 서로 협동하면서 작전을 잘 수행했고([[전격전]] 등) 갈등이 생기면 [[국방군최고사령부]](OKW)에서 조정했다.[* 사실 독일은 전통적인 육군이 강성하던 곳이였으나, 1차세계대전기쯤에는 적국 영국에 대항하고자 해군 육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그래도 공군보다는 끝발이 대체적으로 약한 편이었으나 목소리는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공군은 나치정권에서 2인자급이였던 괴링의 힘으로써 육군이나 해군과 경쟁할 수 있었다. 무장친위대는 애초에 기존 육군을 불신한 히틀러가 직접 창설했으니 목소리가 높은건 당연지사.] 만일 OKW에서 해결이 되지 않으면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당사자들을 모아놓고 교통정리를 했다. 당시 U보트 함대 사령관인 [[카를 되니츠]]의 자서전에 히틀러의 일처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되니츠는 [[U보트]]의 정찰역할을 수행할 해군 소속 항공기 부대가 필요했지만, [[루프트바페|독일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하늘에서 나는 것은[* 즉 [[헤르만 괴링#s-4.6|조류, 새도 자기 관할]]이라는 뜻이다.] 무조건 자신이 관할해야 된다는 이유로 해군의 요구를 거부했다. OKW에서도 이 문제가 조정이 되지 않자, 히틀러가 직접 공군에 소속 항공기 중 무려 300기를 해군에게 넘기라는 총통 친필 지령을 하달하고 괴링을 불러서 호되게 질책했다. 물론 괴링은 반발했지만 히틀러는 오히려 '''"바다사자 작전에서 우리 해군이 전력 상 열세임에도 영국 해군을 상대로 분투할 때 [[영국 본토 항공전|네놈의 공군은 그 빵빵한 지원을 다 받아놓고는 도대체 한 게 뭐길래?]]"'''라고 갈궜고, 체면을 제대로 구긴 괴링은 되니츠에게 다급하게 달려와 같이 저녁이나 하자고 제안했지만 되니츠 본인은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본군의 경우는 사실 메이지 시대 때만 하더라도 이것이 가능했다. 메이지 시대는 천황과 내각이 아니라 소위 천황이 임명한 '원로'들이 정국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로 대표되는 이들 원로들은 [[메이지 유신]]의 당사자들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사실상 근대 일본을 만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목숨걸고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유대감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간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권력투쟁을 벌이더라도 비교적 국가 전체의 이익을 고려해서 일정 선에서 조율하면서 극한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심지어 사쓰마 번의 보스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음에도 사쓰마 출신자들은 출세에 지장이 없었는데 이에는 조슈 출신자들의 최소한의 정치적 배려에도 원인이 있다.] 그리고 일본의 천황이란게 원래 1000년 넘게 실권도 없던 뒷방 늙은이였다가 메이지유신을 전후해서 토막파 인사들이 빠른 근대화를 위한 국가의 상징으로 내세운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국가의 실권은 유신지사 훗날의 원로들이 쥐고 있었다. 즉, 이들은 정부와 군부 사이, 혹은 정부나 군부 조직 내의 각종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알력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힘과 경험이 있었다. 당장 원로들이 살아서 권력을 쥘 때 치렀던 [[러일전쟁]]에서는 육해군의 공조가 훨씬 원활했다. 문제는 이런 조율이 '''철저하게 비공식적인 [[인맥]]에 의한 밀실협의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서양의 근대적인 국민국가들처럼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 제도화된 시스템을 통해서 알력이 조절되는게 아니였기 때문에 이들 원로들이 점점 노쇠화해서 사라지자, 이 방식은 곧바로 한계에 부딪힌다. 원로들의 뒤를 이은 세대는 메이지유신 같은 공통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간에 유대감도 없었고, 아예 학연/지연 단계에서 분리돼서 사적인 인맥도 형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냥 남남이었을 뿐이다. 거기에 육군과 해군 모두 정신론에 찌들은 폐쇄적인 군사교육으로 인해서 국가의 장기적인 미래를 고민할만한 전략적인 사고를 갖춘 인물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당시 일본에는 정치권, 군부, 관료, 경제계를 통틀어서 국가의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외교-국방-경제를 두루 포괄하는 전략적인 사고를 하는 인물이 없었다. 비현실적이었지만 아시아주의를 내걸고 중국-만주-일본의 연합으로 고도국방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그때까지 최소한 30년간은 미국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던 [[이시하라 칸지]]나, 조선과 대만, 만주를 모두 독립시켜주고 이 지역의 자원을 활용한 가공무역국가로 경제성장에 집중하는 소일본을 주장하던 [[이시바시 단잔]] 정도가 예외적인 사례이다. 실제 2차대전 패전 이후 이시바시 단잔의 구상이 실현된게 현재의 경제대국 일본이다.] 한정된 국가의 자원(예산)을 둘러싸고 경쟁하는 관계인데 이해관계를 조율할만한 시스템은 부실하고, 그렇다고 서로 친밀함이나 유대감을 가진 것도 아니다. 결국 남은 것은 서로간에 정치공작과 암살 같은 극한대립 뿐이다. '''군령권 만이 아니라 [[군정권]] 역시 분리되어서 [[육군성]]과 [[해군성]]이 따로 있었다'''. 다만, 이것 자체는 [[영국]], [[미국]] 등 제국주의 시대 열강들이 대부분 공유했던 체계[* 미국만 해도 1948년 이전까지 육군을 담당하는 전쟁부(U.S. Department of War)와 해군부(U.S. Department of the Navy)가 내각의 일원으로 존재했었다. 이후 새로 설치된 공군성과 함께 전쟁성은 육군성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국방부 예하로 격하되었지만 여전히 장관은 임명되고 있다. 이런 역사적 맥락으로 일본은 미국 국방부를 국방총성(国防総省)으로 부르고 있다.]인데, 다른 나라에서는 부서는 별도로 있어도 육해군을 통합적으로 규율할 수 있었지만, 이 때의 일본은 그게 안되고 구 일본의 육해군은 토막의 기치를 내걸고 단결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토막이후 그들만의 리그가 되자 암투를 벌여왔고 이는 군에도 영향이 가 따로따로 노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해군은 육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민통제가 잘 유지되던 편이었고 1930년의 1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 체결까지는 이 체제가 유지되었지만, 1933년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의 주도로 이른바 '해군성군령부 업무호섭개정'이 통과되면서 군정권까지 군령부가 장악, 해군의 문민통제마저도 무너지는 계기가 된다. [[해군반성회]] 및 당시 해군성 군무국 1과장으로 이 사안에 대한 결재를 거부하다 예편 위기에 몰렸던 [[이노우에 시게요시]]의 평전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사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